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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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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6. 18. 08:05 내발자국[동호회]
♧ 96년 6월의 문화인물 - 유일한(柳一韓) / 1895 ~ 1971 ♣

기업가(유한양행 창업자), 독립운동가.

유일한 선생은 1895.1.15(양) 상인이었던 아버지 기연과 어머니 김확실(金確實)
사이에 9남매중 장남으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1904년 9세때 선교사를 따라 미국에 건너갔으며, 고학으로 미시건 대학에서 학
사학위를,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상학(商學) 석사학위를 받은 뒤 스탠포드 대학
원에서 3년간 법학을 전공하였다.

학업을 마친뒤 전자회사 사원으로 잠시 근무한바 있으며, 1922년 자립하여 숙
주나물을 취급하는 라초이식품(주) 회사를 설립. 1925년까지 운영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

1926년 중국계 의과대학생 호미리(胡美利)와 결혼한 뒤 얼마되지 아니하여 귀
국하였으며, 그해 유한양행을 설립하였다.

1934년 독일의 도마크(Domagk.G) 박사에 의하여 개발된 프론토실(Prontosil)
을 동양에서 제일 먼저 도입하였다.

1939년 우리나라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持主制)를 실시하였고, 이무렵 사세도
확장되어 만주, 대련(大連), 천진(天津) 등 동북아 일원에 걸치는 방대한 시장
을 확보하였다.
1939년 사업상의 이유로 다시 도미하였으나,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귀국치 못
한 채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후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재정비하였다.

1969년 기업의 일선에서 은퇴하여 혈연관계가 없는자에게 사장직을 물려줌으
로서 전문경영인 등장의 길을 여는데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독립운동가로서의 공적은 1908년 박용만(朴容萬)이 미국 네브라스카주(州)에
설립한 소년병학교(少年兵學校)에서 군사훈련을 받았고, 1919년 3·1운동이 일
어나자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자유한인대회(自由韓人大會)에 참석하여 결의안
작성위원에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며,

1920년경 '한국의 친구들(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의 보스톤지부
서기로 미국인들의 가입과 기부금 제공 및 지원을 유도하였고, 1928년에는
보스턴에서 『한국에서의 소년시절』, 1943년 『한국과 태평양전쟁』등의 문헌
을 영문으로 간행하여 한국의 진상을 알리는데 기여하였다.

1942년에는 L.A에서 맹호군(孟虎軍) 결성에 참가하였고 현기식(縣旗式)에서
조소앙(趙素昻), 이승만(李承晩) 등의 축사를 대독하였고, 1943년 재미한국인
연합회의 기획연구부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국내진입을 위한 특수임무를 수행할 NAPKO 계획에 참여하여 훈련을
받았으며, 수시로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는 등 조국광복을 위해 많은 기여를
하였다.
1971. 3월 76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서훈으로 산업동탑훈장(1968년), 국민훈장 모란장(1970년)을 받았고, 197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자료:수원시청

posted by 松巖